병자호란 패전 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은 1645년 8명의 한인漢人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왕이문王以文을 비롯한 그들 한인 집단은 명나라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간직한 채 조선 사회에 정착하여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명나라 출신 이주민 사회를 주도했던 왕이문 및 그 후손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황조유민의 이주사와 집단전기Collective Biography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숙종~정조 연간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황조유민에 대한 정책을 한인들의 시각에서 정리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중화주의의 전개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을 통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후기 황조유민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한편, 그들 이주민들이 겪었던 정체성의 고민을 현재적 관점에서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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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사
『상생공연보庠生公年譜』 해제 『상생공연보庠生公年譜』 서문 『상생공연보庠生公年譜』 권1(1625~1705) 『상생공연보庠生公年譜』 권2(1749~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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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문(王以文) 1625년 산동성 제남부 출생. 명나라 사대부 왕충추(王忠推)의 아들이며, 초명은 봉강(鳳崗)이다. 1636년 도적떼의 약탈을 피해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椵島)로 피신했다.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군이 가도를 점령했을 때 사로잡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끌려와 그곳에 머물던 봉림대군을 만났다. 1645년 봉림대군이 풀려나자 양복길(楊福吉)ㆍ풍삼사(馮三仕)ㆍ왕미승(王美承)ㆍ배삼생(裵三生)ㆍ왕문상(王文祥)ㆍ정선갑(鄭先甲)ㆍ황공(黃功) 등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명나라의 회복을 염원하며 북벌 논의에 참여하였다. 평생토록 명나라 신하로서 정체성을 간직하며 살다가 1699년 서울 어의동 황조인촌(皇朝人村)에서 세상을 떠났다. 1815년 5대손 왕덕일(王德一)이 그의 생애를 정리하여 이 책 『상생공연보(庠生公年譜)』를 편찬했다.
■ 옮긴이 우경섭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라헬 인하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청계서당 전문가과정
김자영 인하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청계서당 전문가과정
황민희 인하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한국고전번역원 연수과정
김미지 인하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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