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의 삶과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통찰한 연구서 망원경을 통해 그를 이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미경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의 궤적을 관찰해 보고 싶었는데, 그것이 홍난파의 삶과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난파의 생가부터 각종 홍난파 관련 기념관뿐 아니라 도서관까지 마다하지 않고 돌아다녔던 저자는 논문의 자료 보강을 위한 분들부터, 논문을 쓰는 과정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왜, 홍난파인가?
이 책은 홍난파(洪蘭坡 1898-1941)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객관적으로 통찰한다. 망원경(거시사)으로 이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미경(미시사)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의 궤적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시기 바이올린으로 첫발을 내디딘 홍난파는, 이후 작곡․평론․음악교육․지휘․방송․레코드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폭넓은 활동을 통해 초창기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음악가로 자리매김한 동시에, 한국 근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예술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비록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홍난파의 활동과 업적은 실로 지대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연구는 한 음악가 개인의 연구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한국 근대음악사의 커다란 줄기, 즉 일제강점기 서양음악의 변천과정을 연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홍난파는 친일음악가인가?
이 책은 홍난파에 대한 양극적 평가, 즉 그가 민족음악가냐 친일음악가냐하는 논의에 앞서 그같은 음악활동의 객관적인 근거를 먼저 제시한다. 특히 여기서는 그의 친일음악활동이 자의(自意)에 의한 것인지, 타의(他意)에 의한 것인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홍난파는 민족음악활동도 하고, 친일음악활동도 했다. 1919년 그는 3운동에의 참여로 말미암아 어렵사리 입학한 아시아 유일의 관립인 동경음악학교 본과 진학을 거부당했다. 이 시기 홍난파의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은 최남선이 이끌었던 조선광문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체의 정치․언론활동이 금지된 민족운동의 침체기였던 이 시기 그는 당시 서양음악가 가운데 유일하게 광문회 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민간음악교육기관인 연악회를 조직해서 음악교육과 음악회 개최, 악보집 발간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특히 조선동요백곡집은 마땅히 부를 만한 노래가 드물었던 시대에 그것은 조선의 아동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었다. 심지어 「봉선화」는 금창곡이 아니었음에도 일제하 조선을 상징하는 ‘민족의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말년에는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의 국내지부인 수양동우회 관련자로 피검,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思想轉向に就いての論文)을 쓰고 풀려났다. 이후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조선문예회․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음악협회 등에 가입해서 「정의의 개가」․「공군의 노래」․「희망의 아츰」 등 몇 편의 친일가요와 “지나사변과 음악”같은 친일논설을 남겼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자발적이라기 보다 일제에 의한 탄압의 결과였다. 총독부는 그가 근무하던 이화여전․빅타축음기회사․경성보육학교를 차례로 그만 두게 했고, 그의 사상전향을 위해 70일 이상 감옥에 가두어 모진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얻은 건성늑막염을 재발시켜 마침내 그를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게 하였다. 홍난파가 그런 불행한 죽음을 당한 것은 일제시대를 통틀어 그는 이미 조선 최고를 구가하던 ‘원로’음악인이었고, 그런 그는 총독부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홍난파는 예술음악 작곡가인가?
홍난파의 창작활동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은 이 시기가 지나서도 널리 통용되었다. 해방 이후 「봉선화」․「봄처녀」․「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장안사」․「사공의 노래」와 같은 가곡과 「도레미파」․「달마중」․「낮에 나온 반달」․「퐁당퐁당」․「고향의 봄」․「하모니카」․「햇빛은 쨍쨍」과 같은 동요는 초․중등학교 음악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는 수용자 대중들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봉선화」같은 이른바 ‘예술’가곡을 작곡하였다는 이유에서 예술가곡(혹은, 예술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홍난파는 스스로 예술음악을 작곡하고자 한 적이 없었으며, 그의 음악도 예술음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제공했고, 그것은 대부분 실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청중을 위해서 바이올린 독주곡을 썼고, 레코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신민요와 유행가를 작곡했으며, 음악교육 교재의 필요성에 따라 동요와 가곡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대시기 탁월한 실용적 음악 작곡가였다.
홍난파의 음악적 특징은 무엇인가?
홍난파는 몇 편의 기악곡을 남겼지만, 이들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기악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었다. 가사가 없고 음역이 넓다는 것 이외에 ‘노래’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음악적 성취가 성악분야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성악곡은 가사와 음악의 이상적인 결합을 요구한다. 동요와 가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노래는 대부분 서정적인 정형시를 가사로 선택하였다. 정형시는 정형적인 노래를 만드는데 유리하다. 그는 가사의 음절수에 따라 같은 리듬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노래를 만들어간다. 가령, 「봉선화」는 4조의 음절수에 맞춰 처음 네 개의 리듬이 12번이나 똑같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다. 물론 그의 모든 노래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작곡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리듬이 그대로 반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약간의 리듬변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단순한 리듬과 그 변형은 그의 음악에서 보여지는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한 옥타브, 혹은 한 옥타브를 조금 넘어서는 음역의 범위 내에서 선율이 만들어지고, 이를 지탱해 주는 화성을 적당히 채워 넣음으로써 노래가 완성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노래는 양식적으로 매우 단순하다는데 그 핵심이 있다. 이 단순성은 누구나 쉽게 배워서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는 잇점을 갖는다. 그러니까 그의 단순한 음악은 당대 수용자들과 음악적 소통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홍난파는 한국 근대음악사의 선구적 작곡가였다. 그에 앞선 음악가로 김형준․김인식․이상준 등이 있었으나, 그와는 전혀 비교도 될 수 없었으며, 그보다 조금 늦은 현제명․박경호․박태준 역시 그의 음악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김인식의 경우, 심지어 해방 이후에 작곡된 작품조차 초창기 창가(唱歌), 즉 반주없는 단선율에 주로 2/4, 또는 4/4박자의 뿅꼬부시가 사용된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상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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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Ⅰ첫말
Ⅱ홍난파의 삶과 음악활동 1. 가계와 그 문화 2. 기독교 문화를 통한 서양음악 수용 3. 일본유학과 음악계몽운동 4. 미국유학 전후의 창작활동
Ⅲ홍난파의 음악론과 그 성격 1. 문명개화와 근대주의적 음악론 2. 음악적 민족주의로서의 신조선음악론 3. 식민지 현실인식과 실용주의적 음악론
Ⅳ홍난파 음악의 양식과 특징 1. 아마추어 청중을 위한 기악곡 2. 레코드 청취자를 목적한 노래들 3. 음악교육 교재로서의 동요와 가곡
Ⅴ 끝말
Abstract 홍난파 작품목록 홍난파 집필목록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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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욱金昌旭 동아대학교 대학원 음악문화학과 졸업(음악학박사) 한국학술진흥재단 신진연구인력지원사업 대상자 선정 부산시사편찬위원회·부산발전연구원 공모논문 선정 5·18 기념재단 공모논문 선정 한국음악사학회 제5회 신인논문상 수상 부산음악협회 부산음악상 수상 동아대·동의대·부경대 강사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음악과 민족』 편집팀장 부산예총 『예술부산』 편집위원 국제신문·부산일보 객원평론가
전자우편 kcw66@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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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핑] 홍난파 음악연구 출판 부산일보 | 22면 | 입력시간: 2010-11-22 [09:55:00] ▨ 김창욱 음악평론가가 홍난파 음악연구(민속원)를 펴냈다. 자신의 2004년도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해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논란 속에 친일음악가로 분류되고 있는 홍난파의 행적 및 음악세계를 잘 분석해 놓았다. 홍난파의 삶과 음악활동, 철저한 실용주의적 입장에 섰던 그의 음악론, 음악양식과 특징 등으로 나눠 홍난파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책에서 "희망의 아츰을 창작보급하고 논설 지나사변과 음악을 발표한 사실은 홍난파가 친일음악활동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의 친일은 자신의 직분과 관련된 간접적인 경우가 지배적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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